대공황 좌절 세대 톰, 그의 망상은 …

칼럼/아티클

대공황 좌절 세대 톰, 그의 망상은 …

SVKOREANS 0 1,733 2020.05.31 20:15

“이제 할리우드 주인공들이 미국의 모든 사람을 대신해 온갖 모험을 다 하게 돼 있어. 미국의 모든 사람은 컴컴한 영화관에 앉아 그들의 모험을 보기만 한다고! 그래, 전쟁이 날 때까지는 그럴 테지. 전쟁이 나면 대중도 모험을 할 수 있게 돼!”


철없는 소리다. 그런데 이것이 대공황 시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희곡 『유리 동물원(The Glass Menagerie)』(1944)에서 초라한 직장에 지쳐 있는 영화광 청년 톰 윙필드가 한 말인 것을 감안하면, 그가 왜 이런 헛소리를 했는지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현실이 지긋지긋해 전쟁으로라도 깨부수고 싶은 톰의 모습에서 지금 불황기 영국에서 상점 창문을 깨는 청년들이 연상되니 말이다.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1911~83)의 『유리 동물원』은 30년대 대공황 시기에 한 중하층(lower middle class·중산층 중에서 하층) 가족이 해체돼 가는 이야기다. 방랑벽이 있던 톰의 아버지는 예전에 집을 나가 종무소식이다. 남부의 부유한 집안 출신인 어머니는 화려했던 처녀 시절 이야기를 톰이 지겨워할 정도로 되풀이한다. 그래도 그녀는 잡지 판매원 등으로 억척스럽게 일하며 자식들의 세속적 행복을 기원한다. 누나 로라는 어머니의 무한반복 추억담도, 동생 톰의 불만도 모두 이해하고 받아 주는 따스한 성품과 섬세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하지만 한쪽 발을 저는 장애가 있는 탓인지 낯선 사람과는 말도 잘 못 하고 하루 종일 유리 동물 수집품이나 닦으며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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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톰은 구두공장에 다니고 있지만 화장실에서 몰래 시를 쓰고 또 밤마다 영화를 보러 가며 직장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영화관은 톰 외에도 현실에서 꿈을 잃은 당대의 미국인들이 대리만족을 찾는 장소였다. 미국의 도시 풍경을 많이 그린 화가 레지널드 마시의 ‘이십센트 영화’(그림)는 바로 그런 대공황 시대 극장의 모습을 보여 준다. 요란한 포스터 속 영화배우 얼굴들이 그 아래 실제 사람들보다 더 뚜렷하게 돌출돼 있다. 관객 대다수가 마치 그 시대 할리우드 배우처럼 한껏 차려입고 서 있는데 그들의 공허한 얼굴 너머 내면은 전혀 읽을 수 없다. 영화에서 얻은 환상을 그대로 몸에 덧입고 있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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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는 대공황 시대의 도시 풍경을 사실적이면서도 동시에 상징적으로 그려 냈다. ‘왜 L(고가철도 전철)을 이용하지 않나요?’(그림)의 제목은 그림 위쪽, 전철 차창에 붙은 광고 문구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지하철도 빠르지만 고가철도 전철도 빠르고 더욱 편안합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밑에서 입까지 떡 벌리고 잠들어 있는 노숙인 같은 남자와 넋 놓고 앉아 있는 여자에게 빠른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바삐 출근할 곳도, 즐겁게 가고 싶은 곳도 없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톰은 아침마다 출근할 곳은 있으나 기꺼이 가고 싶은 곳은 아니다. 나무라는 어머니에게 톰은 악을 쓴다. “난 아침마다 거기 출근하느니 누가 쇠지렛대로 내 머리통을 박살내 줬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나는 가요! (중략) 한 달에 65달러를 벌려고,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꿈 다 포기하고 말이에요!”


실직해 당장 굶어 죽게 생긴 노동자에게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한창 큰 꿈을 지닐 나이에 더 나은 일을 찾지 못하는 톰의 절규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처럼 영화관이나 댄스홀에서 희망 없이 흐느적거리는 젊은이들을 보며 전쟁이라도 터지길 원한다. 최근 영국에서는 젊은이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약탈 쇼핑을 했다. 양쪽 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 뒤에는 모두 높은 청년실업률, 고급 일자리의 부족, 계층 이동 가능성이 점점 축소되는 닫힌 사회가 도사리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남의 나라 일이 아니라는 것도.


물론 대공황 시대에 짐 같은 모범 청년도 있다. 로라에게 남자 좀 소개하라는 어머니의 성화에 톰은 같은 공장에 다니는 짐을 집으로 초대한다. 그는 톰처럼 별 볼일 없는 집안 출신이지만 고교 시절 공부·운동에 모두 뛰어난 ‘엄친아’였고, 지금 직장에서도 성실성으로 인정받는 데다 야간 대학에 다니며 성공할 꿈을 다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는 고교 동창 로라가 유일하게 짝사랑한 대상이기도 했다. 톰의 집에 와서 로라를 만난 그는 로라의 진가도 알아 준다. 이대로 가면 해피엔딩. 하지만 짐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로라는 이제 타인에 대한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 버리고, 톰과 어머니는 그 일로 크게 싸운 뒤 마침내 톰은 집을 뛰쳐나간다.


로라는 그녀가 수집하는 유리 동물 조각품처럼 “참으로 아름답고 참으로 깨지기 쉬운” 존재다. 로라는 유리 동물 중에서도 자신처럼 독특하고 고독한 유니콘을 특히 아낀다. 중세 태피스트리에 나오는 것처럼 전설 속 유니콘은 오직 자신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운 여인에게만 마음을 열고, 때로는 여인에게 기대어 잠들기도 한다. 이때 만약 여인이 배신하고 사냥꾼들에게 이것을 알리면 유니콘은 죽임을 당한다.


짐은 로라와 춤을 추다가 실수로 유리 유니콘을 쳐서 뿔을 부러뜨렸다. 짐이 무척 미안해하자 로라는 유니콘이 수술을 받아 보통 말처럼 됐다고 재치 있게 대답한다. 그때 그녀는 자신도 정신적 수술을 받고 짐과 함께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짐이 이미 약혼했음을 알고는 뿔이 떨어져 나간 유니콘을 작별 선물로 준다. 이렇게 보통 말이 된 유니콘은 짐과 함께 떠났고 로라는 유니콘으로 남는다-모처럼 마음을 열었다가 죽임을 당한 유니콘으로.


톰의 가족이 행복하지 못한 것을 사회 탓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대공황 시대가 아니었더라도, 또 자본주의 산업사회가 아니었더라도 이 가족의 몽상가적 꿈을 사회가 일일이 해결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 모범 청년 짐처럼 살아야 하고, 톰과 로라는 도태돼야 마땅한 것일까? 사회가 그보다는 열려 있고 다양한 꿈을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 사회에도 수많은 톰과 로라가 있기에 『유리 동물원』이 먼 이야기로만은 들리지 않는다.


『유리 동물원』은 작가의 자전적인 면이 많은 작품이다. 테네시 윌리엄스(사진)의 가족 역시 남부에서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했고 작가 자신이 톰처럼 구두공장에서 일하며 밤에 극작에 몰두한 경험이 있다. 톰의 어머니와 누나 로라 역시 작가의 모친과 누나 로즈를 모델로 한 것이다. 누나가 점차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다 제정신을 완전히 잃게 되면서 깊은 슬픔에 빠졌다. 『유리 동물원』에서 톰이 로라를 떠나고 도 로라를 기억에서 떨치지 못하는 것은 작가가 누나와 겪은 정신적 이별과 누나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반영한 것이다. 이 작품으로 윌리엄스는 명성을 얻게 됐고 다음 작품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47)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대공황(Great Depres sion)=1930년대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지속된 전대미문의 경기불황. 1929년 10월 미국에서 이른바 ‘검은 목요일’과 ‘검은 화요일’의 주가 대폭락과 함께 시작됐으며 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끝났다. 원인에 대해서는 만성적 과잉생산, 경기 사이클에 따른 소비와 투자 축소, 연방준비은행의 금융 긴축 등 여러 요소가 한꺼번에 겹치면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출처: 중앙일보] [J 스페셜 - 목요문화산책] 대공황 좌절 세대 톰, 그의 망상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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